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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OF 2019 <핑크페미> : 고꾸라지면서 고민하기

  • 작성일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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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OF 2019 <핑크페미> : 고꾸라지면서 고민하기 

 

이상현 (인디다큐페스티발2019 관객모니터단) 

 

 

 

핑크페미분홍색페미니스트의 조합이다. 남아름 감독 본인을 지칭하는 이 타이틀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단어끼리의 만남처럼 보인다. 분홍색은 소위 여성스러운 색으로 간주되는 게 보통이며, 페미니스트는 문화와 사회가 여성성으로 규정하고 주입하는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분홍색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가 탄생한 걸까? 영화는 답을 주기에 앞서 익살스러운 BGM과 함께 초등학교 초년생 여자아이가 쓸 법한 물건들을 내보낸다. 헬로 키티 소품들, 인형이 달린 책가방, 파우치, 노트...모든 게 다 분홍색이다. 다음 장면은 미투운동을 지지하는 촛불시위 현장이다. “성차별, 성폭력, 당장 박살내자!”라는 구호가 쟁쟁하다. 카메라는 시위 현장에 엄마와 동행한 어린 여자아이들을 담는다. 흑백 화면 속에서 아이들이 걸친 외투만이 선연한 분홍색으로 빛난다. 뒤이어 나오는 인터뷰와 자료 화면을 통해 감독은 자신이 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엄마 손을 붙잡고 여성운동 현장에 동참하는 유년기를 보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어린 감독에게 페미니스트 엄마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핑크페미>는 긴 머리와 치마 유니폼을 거부하는 꼬마 페미니스트였던 감독이 분홍색 마니아로 자라게 된 과정을 초중반부에 걸쳐 보여준다. 감독은 당시의 기억과 관련된 자료들을 토대로 모친인 변현주(한국여성인권진흥원 가정폭력방지본부장)와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감독의 나이를 주축으로 한 영화의 연대기적 구성은 곧 변현주가 여성인권운동에 헌신하게 된 계기와 흐름을 톺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변현주 개인과 그를 통한 대한민국 여성운동사의 굵직한 흐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여성인권운동가의 딸로서 감독이 흡수하게 된 가치관과 감내해야 했던 상황을 중점적으로 서술한다이때 눈여겨볼 점은 두 사람이 나란히 수평의 형태로 앉아서 카메라 대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한다는 것이다.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보면서 여성인권운동가이자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위치와 엄마의 역할은 양립할 수 없음을 느껴왔다고 고백한다.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엄마의 역할로 규정된 감정 돌봄의 서비스를 기대하고, 필요로 하게 되지만 여성인권운동가이자 관련 기관에서 일하는 직장인은 엄마의 역할에 수반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여력이 없다. 12살 아이가 서운함을 담아 보낸 이메일에, 여성인권운동가인 직장인 엄마는 남녀차별이라는 공공의 언어로 대응한다. 감독이 그 답장을 받고 느꼈던 충격을 토로했을 때 변현주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 둘 곳도 찾지 못하는 장면은 <핑크페미>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여성인권운동가이자 직장인인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변현주가 동년배 여성들을 대표하여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는 일에 대한 부당함을 발언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는 힘껏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은 성장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엄마의 모순을 목도하게 된다. 감독이 보기에 모친은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도 가사노동과 명절 대소사 등에 있어서는 수평적이지 않은 부부관계를 유지한다. 그에 대해 변현주는 과도기적 과정이라고 답변하면서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어야 하고 투사적이어야 한다면 슬픈 페미니즘 아니야?”라고 반박한다. 영화에 페미니즘이란 대체 뭘까?”라는 고민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 지점부터다.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발해야 할 페미니스트’ ‘엄마가 딸들이 치장을 하는 일에는 결코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 여성단체에서 나누어주는 문구용품만을 쓰도록 강요한 것, 학벌과 외할머니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지금의 지위에 따르는 발언권을 얻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고찰이 이어진다.

 

 

감독이 사 모으게 된 분홍색 물건들 사이에는 학창시절 내내 써야 했던 여성단체명이 기입된 학용품들과 그 이름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각종 스티커들이 있다. 그렇게 영화는 페미니스트의 딸로 사는 건 버거웠다고 밝히는 자막과 페미니스트보다 공주병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자막 사이에 나름의 큰 중압감이 작용했음을 알린다. 학창시절의 감독에게 페미니즘이란 곧 페미니스트 엄마로부터 배운 게 전부였다. 자신이 배운 것들,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실제 생활에서 보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 사이의 괴리감은 커져만 가고, 그는 결국 엄마도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는 깨달음을 적은 시화(詩畫)로 나타나게 된다.

 

 

페미니스트 엄마와 달리 페미니스트로 사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감독이 변하게 된 시점은 국내 미투 운동이 본격화되었던 2018년부터다. 감독은 페미니즘의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어느 지점에 자기 좌표를 찍을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 보기 위해 학내 성 평등 위원회 대표직을 맡게 된다. 이는 페미니스트 엄마가 변화의 중심부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고 그 딸로서 새롭게 느끼게 된 책임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동시에 감독은 분홍색을 사랑하고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자신도 받아들인다.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하게 여성적인 것으로 주입되어 온 분홍색을 지지하면서도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독 내면에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변화에 따른 결심은 결과적으로 앞 세대 페미니스트인 감독의 모친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변현주는 여성인권운동을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감독이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을 이렇게 묘사한다. “신경질이 완전 난, 너무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고서 사실은 엄마가 한 방 먹긴 했어.” 늘 앞서 걸어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이가 밝힌 이탈 의사는 평생을 페미니스트 엄마를 바라보며 자라온 감독에게 큰 배신감으로 다가온다. 감독은 페미니스트 엄마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자신만의 페미니즘을 찾아가겠다고 결심하면서도, ‘페미니스트엄마를 향해 도망가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이는 변현주가 새롭게 운동을 지속할 동력으로 작용한다. 동력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아니다. 사적 언어로 엄마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던 10대 초반의 아이가 공적 언어로 앞 세대 페미니스트에게 책임을 일갈하는 20대 초반의 성인이 되었다는 데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변화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감독에게 있어서 여성인권운동은 삶의 필연적인 일부로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며, 감독이 새로운시류의 일환인 미투 운동에 영향을 받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 자체가 여성들이 소리 내어 사회에 책임을 묻고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옛 세대가 구축해온 구조에 책임을 묻고 더 나은 방향으로 달라질 것을 촉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는 응당 두려움을 가지고 경청해야 할 대상이다. 변현주 자신도 미투 운동을 이끌어나갈 힘은 새로운 세대의 지속적인 관심에서 온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딸의 눈빛에서 그 힘을 느낀 순간 페미니스트 엄마는 변화한다. 이는 곧 인터뷰 장면에서 구현되었던 모녀간의 수평관계가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치환되며 집합적 에너지를 획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핑크페미>는 변화하는 세상을 걸어갈 새로운 방식의 페미니즘을 찾겠다는 약속이자 내 삶을 바꾸고 누군가의 삶도 바뀌게 했던 소신을 되새기는 기록이며, ‘지금의 나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는 자기 역사의 서술이다. 영화는 출발점에 서기 위해 지난날 감독이 느꼈던 미세한 균열들을 짚어내어 직시하는 과정을 걷는다. 엄밀히 말해 출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과 동시대 사람들의 여정은 내 삶을 바꾸고, 누군가의 삶도 바뀌게 했던앞 세대의 여정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과 흐름은 결코 이전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핑크페미>만 해도 자못 단단한 결의를 분홍색 메모지를 통해 전에 없던 방식으로 던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핑크페미>는 정답도, 도달점도 없는 여정에서 고민을 지속하면서도 고꾸라지지 않는 방법, 고꾸라지면서도 고민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