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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OF 2019 <우리 아버지께> : 유령의 기도

  • 작성일2019.06.03
  • 조회수379

 

SIDOF 2019 <우리 아버지께> : 유령의 기도

 


김한얼 (인디다큐페스티발2019 관객모니터단)

  

당연한 것은 언제부터 당연한 것이었을까.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문화는 이제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농촌에 청년들이 더 이상 남지 않는 현상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것만 본다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말이 정말인건가도 싶지만, 이 세상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다. 여기, 대한민국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 군산시 상평마을에 이제는 대부분 장년과 노년의 신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작은 교회가 있다. 교회의 여성신도들은 수십 년간 예배 후 식사차림 노동을 해왔다. <우리 아버지께>는 여성신도들의 교회생활과 기도 음성을 담아낸다. 이를 통해 영화는 한국의 가부장적 전통과 결합한 기독교가 한국 사회 내에서 어떤 현상을 만들어냈는지 관찰한다.

 

 

어두운 밤이 지나 아침이 밝아온다.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흐르고, 식물들이 자라난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자연스럽게 조응한다. 논, 전봇대 등의 이미지와 함께 들려오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리 아버지께>는 “띵” 종소리를 울리며 자연의 섭리를 뒤로 한 채 불협화음 연주를 시작한다. 피아노 연주를 따라 장년과 노년의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이미지들이 나열된다. 열정으로 설교하는 목사님과 정성스런 신도들의 기도 장면이 끝나면 노란 행주를 든 주름진 손이 보인다. 예배를 마치고 노년의 여성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준비하고 행주로 식탁을 닦는다. 수 십 년 동안 이 행위는 교회의 오랜 전통처럼 진행되어왔다. 마치 천지창조 이후 그런 일은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피아노의 불협화음 독주와 만나면서 하나의 질문을 낳는다. 언제부터 그녀들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을 시작으로 영화는 노년 여성신도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기독교집안인 우리가족은 명절에 제사 대신 예배를 드렸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로 할머니가 기도를 하셨다. 제일 기다리기 힘든 시간이 할머니가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다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의 긴 여정은 ‘아버지 하나님’의 호명으로 시작되곤 했다. 아버지를 부른 뒤에는 이렇게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해주심을 감사드린다는 기도를 드리셨고, 그 이후 첫째 아들, 둘째 딸, 셋째 아들 순으로 모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셨다. 작은 삼촌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기도가 거의 다 끝났다는 신호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할머니가 그렇게 길게 기도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 자신에 대한 기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명절기도뿐 아니라 평소 혼자 기도를 하실 때에도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자신이 잘 되는 것이라 믿으며 기도해오셨다. 

 

 

<우리 아버지께>의 노년 여성신도들의 기도도 그랬다. 자신이 잘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그녀들의 기도 역시 남아있는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왜 그들의 기도 속에는 자신의 이야기는 없는가. 영화는 기도하는 그녀들의 목소리 앞으로 그녀들의 생활공간을 비춘다. 다시 말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영화에 들리는 목소리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없는 대신, 그 존재가 살아온 삶의 흔적만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텅 빈 그녀들의 삶의 공간 위에 자기 자신은 없고 타인만을 위한 기도가 흘러나올 때, 여성신도들은 실체 없는 유령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들의 입으로 발화했던 수천수만의 단어와 문장이 공허하게 떠돌아다닌다. 그 단어와 문장 안에 그녀 자신과 그녀의 신(神)이 만드는 오롯한 대화는 없다. 신과 그녀들의 만남은 온전히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문장 속에서, 그리고 노란 행주 속에 멈춰있을 뿐이다.

 

 

영화는 여성 신도들의 기도 음성을 모두 들려준 후, 마지막으로 불협화음 속에 떠돌아다녔던 그녀들의 존재를 비추기 시작한다. 고요한 교회 공간 속에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그녀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소음들이 고스란히 들리기 시작한다. 들숨에 배가 올라가고, 날숨에 배가 내려가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입을 오물오물 거리는 그녀들의 행동도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예배를 드려야하는 공간, 그리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 공간에서 아무런 격식 없이 누워있는 그녀들에게 불협화음의 연주 대신 평온한 시선을 보낸다. 그 순간 실재하지 않고 떠돌아다녔던 유령들은 숨 쉬는 존재가 된다. <우리 아버지께>는 이렇듯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당연했던 것들에 대해 불협화음을 던지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것들에 균열을 내고 있다.